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자 피에르 (문단 편집) === [[1차 십자군]] === 민중 십자군이 궤멸당한 후, 피에르는 1096년 겨울부터 1097년 4월까지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발이 묶인 채 십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드프루아와 보두앵, 레몽, 보에몽 등을 비롯한 십자군에 참여한 영주들이 차례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고, 교황이 파견한 대리인인 주교 아데마르의 지휘하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097년 5월, 은자 피에르는 1차 십자군과 함께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얼마전에 무참히 털렸던 피에르가 다시 떨거지들을 데리고 왔다는 소식에 룸 술탄국의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1차 십자군은 엄연히 뛰어난 지휘관들과 잘 훈련된 전문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숫자만 많을 뿐 오합지졸이었던 민중 십자군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결국 룸 술탄국은 1차 십자군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방심의 댓가를 치르었다. 이처럼 1차 십자군은 지휘관들의 뛰어난 능력과 타고난 운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민중 십자군이 궤멸당하는 바람에 은자 피에르는 이전과 같은 권력과 발언권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그의 역할은 십자군 전도를 하고 다닐 때 처럼 열성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설교를 통해 십자군들의 사기를 고취시켜 주는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1098년 초,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였으나, [[모술]]의 아미르인 카르부가에게 장기간 포위를 당하면서 거의 [[고사]]당하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이처럼 상황이 절박해지자 많은 이들이 [[탈영]]을 시도했는데, 그 중에는 피에르도 끼어 있었다(…). 피에르로서는 굴욕적이게도, 그는 그때까지도 품속에 하느님이 내려 주었다는 그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다시 붙들려온 피에르는 눈물을 흘리며 십자군들에게 자신이 신앙을 잠시 잃은 것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다만 포위된 안티오키아 내에서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십자군 병사들은 피에르의 설교로부터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십자군은 카르부가를 격퇴하고 안티오키아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성지 예루살렘 또한 십자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1차 십자군 원정은 기독교 세력의 승리로 끝이 맺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